지난 9월 16일(금), 많은 기도와 사랑 덕분에 무사히 로고스호프에 승선했습니다.
출국 이후 선교선에 승선하기까지 약 150일의 기간 동안 선교사로서 유럽에서 생활하며 여러 도시를 둘러보는 것은 이전의 여행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과 관점으로 이 땅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기회였습니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와 유럽 선교, 그리고 승선 직후 훈련 기간의 기도 제목을 보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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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를 뽑으라면 단연코 유럽일 것입니다.
배경지식이 없어도 영상으로만 보던 유명한 장소들, 그리고 뛰어난 경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싫은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공식 일정 외에, 저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값지고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고민하는 중에 단순한 유흥으로서의 여행이 아닌, 유럽에 남아있는 수많은 종교개혁의 흔적들을 찾아가며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점들을 묵상하고 사역 준비에 보탤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좋은 쉼과 재충전의 시간이 어딨을까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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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유명 관광지에 대한 정보는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많지만, 종교개혁과 관련한 곳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개혁 운동의 주요한 사건과 인물,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장소들을 찾아 정리하고, 또 짧은 일정에 맞게 동선을 계획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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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무려 12명의 인물과 4가지 추가 사건을 알고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일 보름스의 종교개혁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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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시간적 한계 때문에 모든 곳을 다 가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이 과정에서 우선순위를 생각하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 엮인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알아갈 때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가만히 앉아 당시의 상황과 하나님의 큰 뜻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사역에 어떻게 도움이 되어볼까 했던 얕은 기대를 뛰어넘어 인생 전반에 걸쳐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지 깊게 깨닫는 기회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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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텐 루터(Martin Luther)와 독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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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Heidelberg) - 95개 조 반박문이 게재된 후 로마 교황청의 첫 반응은 합리적인 조치가 아닌, 총회를 통한 은폐였습니다. 자정의 목소리가 들릴 때, 겸손히 받아들이는 일은 개인이나 단체나 상관없이 모두에게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사진) 하이델베르크 대학 광장의 루터 방문 기념 명판.
이 장소에서 변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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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노회 총회에서 루터는 여러 사제 앞에서 성경에 기반한 바른 논지를 제시함으로써 큰 지지를 받게 되고, 종교개혁의 불씨가 더 멀리 퍼져나가는 계기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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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Worms) - 이후 당대 최고의 의결 기구인 제국의회의 자리에 소환된 루터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피하지 않고 보름스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곳에서는 제국의 군사들이 아닌, 그를 위해 마음 모아 기도하는 수많은 지지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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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황제 앞에서 당당히 "제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 서 있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이라는 유명한 변론을 남깁니다. - 기적같이 목숨을 건진 루터는 이후,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노랫말에 간증을 남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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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반시계 방향으로) 화재로 없어진 제국의회 장소에 마련된 루터 기념물 / 건물 벽면에 그려진 제국의회 장면 /
루터가 의회 기간 머무르던 숙소의 터.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입구의 명패를 통해 그 장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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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칼뱅(Jean Calvin)과 프랑스, 스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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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용(Noyon)과 파리(Paris) - 루터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으로 알려진 장 칼뱅은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수도원에 다니며 신앙의 기틀을 다집니다. 비록 6세에 모친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지만, 열성적인 아버지의 노력에 부응하여 신앙과 학업에 모두 훌륭한 성과를 거둡니다.
(사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누아용의 칼뱅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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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떠난 칼뱅은 신학의 깊이를 더욱 공고히 하였고, 법학으로 전공을 변경한 뒤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며 인문학 등으로 그의 시야를 넓힙니다. 이때 독일에서 전파된 루터의 이론을 접하며 개혁적인 신앙을 가지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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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이 다니던 학교는 현재 도로명으로만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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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부르(Strasbourg) - 기독교강요의 초판 출간 이후, 후술할 제네바에서 한 번의 실패를 겪은 칼뱅이 향한 곳은 스트라스부르였습니다. 이곳에서 이미 루터의 영향을 받아 개혁교회를 목회하던 영적 아버지, 마르틴 부서(Martin Bucer)와 가까이 지내고, 프랑스 난민 교회를 섬기며 교회와 목회를 배웁니다.
(사진) 마르틴 부서가 사역하던 교회는 현재도 루터교회로 사용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그의 묘비를 찾아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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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요하네스 슈투름(Johannes Sturm)에 의해 설립된 학교(김나지움)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였습니다. 이곳은 현대 독일 중등교육의 모델이 된 곳으로, 시스템과 커리큘럼 등 시대를 앞서간 운영 방식은 칼뱅에게 큰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 미망인 이들레뜨 드 뷔레(Idelette de Bure)를 만나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서 칼뱅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모든 영역에서 엄청난 성숙을 거두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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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프랑스 난민 교회에는 1대 담임 목회자 칼뱅과, 2대 담임 목회자(브룰리)를 기념하는 명패가 붙어있다. |
요하네스 슈투름의 김나지움 입구. 현재도 학교로 사용 중이며, 작은 명패에는 "스트라스부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 적혀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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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Genève) - 칼뱅은 처음 이곳으로 건너와 기욤 파렐(Guillaume Farel)과 개혁 도시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급진적인, 혁명적인 주장은 의회와 시민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추방당하게 됩니다.
(사진) 칼뱅이 목회했던 생 피에르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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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라스부르에서 머무는 동안, 제네바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혼란스럽게 되어 다시 칼뱅을 초청하게 됩니다. 그는 많은 아픔과 상처를 받았던 이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이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칼뱅은 편지에 이런 글을 남깁니다.
"나의 심장을 주님께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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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칼뱅이 제네바에서 사역할 때 살던 집. 이 건물과 생 피에르 교회로 오가는 거리는 현재 '칼뱅길'이라는 도로명이 붙어있다. |
옛 제네바 아카데미 건물. 현재는 신학을 가르치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학교로 사용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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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숙해진 칼뱅은 여전히 반대파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개혁을 마칩니다. 특히, 교육기관인 칼뱅 콜레주(collège)와 제네바 아카데미(académie)를 만들어 신학을 중심으로 '가르치기'에 힘썼습니다. 그의 개혁 정신은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제자를 통해 세계 각지에 퍼지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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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위그노(Huguenot) - 루터의 영향으로 회심한 사람들(위그노)이 많이 생겨났으나, 곧 탄압으로 인해 대부분 스트라스부르 또는 스위스 등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출신인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루어낸 위대한 일은 본국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일으켰고, 한 성도의 집 지하에서부터 프랑스 최초의 개혁교회가 시작됩니다.
(사진) 이곳에서 세례가 집례 되며 첫 프랑스 개신교회가 설립된다. 그러나 현재는 이 부근에서 개신교 역사와 관련한 표식을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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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그노의 세력은 점점 커졌지만, 그만큼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국가 차원의 박해는 이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게 되었는데, 프랑스 전역에서 수만 명의 위그노가 순교 당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브르 박물관의 채플은 그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사건의 시작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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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현장, 생 제르맹 록세루아 교회 |
위그노의 집이었던 이노성 분수. 위그노들의 모임과 예배의 장소가 공동묘지로 바뀌고, 다시 분수 광장으로 바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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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Heidelberg)와 요리문답 -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가 있는 도시답게 다양한 학문이 공존했던 이곳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찬 논쟁 등 일치되지 않는 의견에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갈등을 봉합하고, 성경에 기반한 신앙고백을 정리하고자 학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사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탄생한 성령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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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무수한 토론과 논쟁을 거치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오직 성경'에 입각해 주장을 펼쳤던 칼뱅의 개혁 사상이 많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개혁가들의 본질은 동일했으므로 모든 교인을 폭넓게 아우를 수 있는 건전한 포용력을 갖추도록 서술되었고, 곧 교육과 설교를 위한 교재로 유럽 전역에서 사용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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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과 존 낙스(John Knox) - 일찌감치 회심한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사정에 의해 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네바의 영국 피난민 교회에 청빙 되어 약 2년 6개월 동안 사역할 때, 칼뱅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그의 사상은 물론, 장로정치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사진) 에딘버러의 존 낙스 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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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돌아온 존 낙스는 강력한 설교를 통해 시민들을 일깨웠고, 성공적인 개혁을 이루어냅니다. 충분한 명성과 권위를 가졌음에도 그는 칼뱅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의 무덤은 성당 뒤편 주차장에서나 찾을 수 있으며, 생가(生家)는 아무도 찾지 않아 황량한 땅에 작은 기념비 하나만 서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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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존 낙스가 묻혀 있는 에딘버러의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뒤 23번 주차장 |
존 낙스가 태어난 해딩턴에는 관리가 되지 않는 생가터에 오래된 나무와 기념비만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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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떠나는 모험 -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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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역사는 결코 큰 인물, 특별한 사건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당대 주님께서 쓰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작은 그림의 퍼즐이 하나씩 하나씩 맞춰져 가고, 또 이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과정으로 멋진 큰 그림이 탄생하는 놀라운 섭리를 발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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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는, 과거를 돌아보며 삶에 어떤 적용을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힌트는 여행 중에 만난 현지 교회와 선교사님을 통해 명확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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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 칼뱅의 가르침을 받은 허다한 그리스도인이 다시 그들의 본국으로,
세상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을 했던 것처럼
유럽 전역에 만연한 세속화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다시 온전한 제자들을 훈련 시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한국의 사랑의교회와 영국 웨일즈(Wales)의 작은 시골 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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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젠드(Bridgend)의 유니온 신학교(Union School of Theology)가 하고 있습니다.
그 실무의 중심에는 사랑의교회에서 파송 받은 소수의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사진) 유니온 신학교 내 유럽교회 개척 및 제자훈련 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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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분들과 교제하며 간증을 들을 때,
저라면 벌써 포기하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상황에서 믿음으로, 또 주님을 신뢰하며 방향을 잃지 않고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디디면, 어느새 보이지 않던 새 길이 열려있고, 주님이 그리시는 큰 그림을 바라보며 그 신실하심을 높여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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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선 승선이 지연되며 가지게 된 뜻밖의 발칸반도 여행 기간,
여러 나라에 공격적으로 포교하는 튀르키예의 무슬림을 보며, 그리고 선교의 문이 닫힌 것 같은 역사 속 배경과 아픔을 알게 되면서 어떻게 이곳에 주님을 따르는 활력있는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을까 걱정과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진) 사라예보 올드타운에서 만난 옛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과 튀르키예 국기의 모습. 발칸반도의 여러 국가에는 튀르키예가 세운 모스크 및 이슬람 관련 건물이 많다. 사진과 같이 길거리에서 국기를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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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연히 만난 세 분의 한국인 선교사님과, 현지인들과 각각 대화하며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이슬람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직 복음이 들어갈 여지가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불확실한 상황 중에 우리에게 주신 능력으로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면 성령께서 반드시 역사하실 것이라는 강한 소망을 얻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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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면,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루터가, 칼뱅이, 위그노들이, 낙스가 그랬던 것처럼 실패하고 낙심하고 거절당하고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사진) 이슬람 색채가 강한 코소보의 프리즈렌에서
길을 다니며 무료로 성경을 나눠주는 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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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정신을 바탕으로 예수님처럼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사역이 본질임을 잊지 않는 제자의 삶, 그러한 선교 사역이 방향임을 마음에 새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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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전도서 9:1,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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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때 선교선 사역에 부르셔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 잘 모릅니다.
간혹 다른 생각이 들거나 옛날이 그리운 순간에도, 이해가 안 되는 현실에 답답할 때도
그냥 믿음으로 걸어가 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결국 멋진 완성품을 바라보는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특별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모험을 떠나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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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고스호프에 승선한 이후 약 100여 명의 동기 선교사들과 함께 기본 훈련 및 오리엔테이션 과정을 갖고 있습니다. (~10.2) 이후 부서 배치와 함께 사역을 시작하게 되는데,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선교선 역시 많은 신임 사역자들을 맞이하며, 리더십 교체로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적응의 시간을 은혜 가운데 잘 보낼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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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근 며칠 동안 선교선 내 사역자 중 감기 및 코로나 의심 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이미 몇 차례 COVID-19가 휩쓸고 지나간 곳이라 집단면역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배'라는 특성상 병원균 확산이 쉽고, 면역력 관리가 어려운 탓에 건강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코로나 확진 이력도 없고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지만 안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선교사가 건강하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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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계속해서 로고스호프가 정박해 있는 알바니아를 위해 기도합니다. 특별히, 여러 선교단체를 통해 오신 약 50여 분의 한인 선교사님들이 지역 곳곳에서 사역 중이십니다. 종교성이 약한 이 민족 가운데 다양한 모양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에게 지치지 않는 힘 주시고, 알바니아 지역 교회에 부흥의 바람이 일어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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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고스호프 선교선은 지난 1일(목)부터 알바니아 블로러 항구에 머무르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10월 6일(목), 두러스로 이동하여 19일(수)까지 일정을 소화한 후, 몬테네르고 바르에서 다시 선상 서점을 개장할 예정입니다.
[ 로고스호프 사역 일정 ]
🇦🇱 알바니아, 블로러 (Vlore) 2022.09.01 ~ 2022.10.06
🇦🇱 알바니아, 두러스 (Durres) 2022.10.06 ~ 2022.10.19
🇲🇪 몬테네그로, 바르 (Bar) 2022.10.20 ~ 2022.11.08
🇲🇪 몬테네그로, 헤르체그 노비 (Herceg Novi) 2022.11.08 ~ 20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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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뉴스레터는 여기까지
오늘도 활기찬 하루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기 원하시는 기도제목, 여러 생각들을
카카오채널 또는 이메일 회신을 통해 알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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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ing Knowledge, Help and Hope"
선교사역에 관심, 물질과 기도로 후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교사 한 사람을 위해 동역자께서 보내주시는 헌신들이 모여 큰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재정후원 : 국민은행 440290-29-002462 (사단법인한국오엠_손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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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호프 손현주 선교사 파송교회 : 사랑의교회 | 파송단체 : 한국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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